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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S

[KV] 아스피린과 부루펜

선새ㅐㅇ님 2018. 8. 29. 23:57




창밖으로 쉴 틈 없이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알록달록한 우산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벽에 머리를 기댄다. 장마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태형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웃는 모습이 예뻤고, 주변 사람을 잘 살피고 하나씩 챙기는 다정함이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김태형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혹은 타인이 자신에게 상처 주는 것을 지독히도 꺼렸다. 그런 김태형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길가의 풀꽃 하나 제멋대로 다루는 법이 없는 순하고 착한 김태형도, 자신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제 할 말을 다 하는 김태형도 좋았다. 전정국은 그런 김태형을 좋아했다. 그런 김태형이 저를 향해 웃어줄 때마다 휘어지는 눈꼬리나 맑은 웃음이 그리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태형은 생각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단호한 말을 뱉어내면서도 속으로는 혹시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할까봐. 저 사람에게 자신이 상처를 주었을까 벌벌 떨고 있었다. 김태형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것을 겉으로 티내려 하지 않았다. 전정국은 그런 김태형을 가만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김태형을 자주 안아주곤 했다. 다 괜찮을 거라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누가 형에게 못되게 굴면 내가 대신 싸워줄게요.”

 

김태형은 불안한 얼굴로 손톱 밑살을 잡아 뜯다가도 전정국의 말간 얼굴을 보며 자주 웃곤 했다. 기특하다며 전정국의 턱을 톡, 가볍게 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김태형은 전정국으로 인해 자신의 유약함을 견뎌낼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전정국은 김태형이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우리, 그만하자.”

 

전정국은 김태형에게 이별을 통보받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김태형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알고 있었던 건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김태형은 이별을 고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정국은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김태형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진심으로 내가 미워진거라면, 김태형은 왜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걸까.

 

김태형은 전정국을 사랑한다. 전정국이 김태형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정국은 겁이 많아 잔뜩 웅크린 채 덜덜 홀로 떨고 있을 김태형을 생각한다. 무슨 말을 들었을까.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태형은 왜 전정국을 밀어내려 할까. 책 끄트머리를 잡아뜯던 행위를 멈춘다. 홀로 생각하는 것으론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김태형은 전정국을 사랑하면서도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려고 했다. 자신에게 이별을 말하고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평소와 같이 창밖을 바라보는 김태형을 가만 응시한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 형은 이제 내가 없어도 괜찮은걸까. 전정국은 제 앞에 앉아 콜록거리는 김태형을 바라본다. 버스가 덜컹 거릴 때마다 김태형은 금방 쓰러질 사람처럼 기침을 했다. 전정국은 턱을 괸 채 김태형을 바라본다. 김태형은 자주 감기에 걸렸다. 날이 조금만 추워지면 코를 훌쩍거렸고, 잔기침을 뱉어낼 때가 잦았다. 그런 김태형 탓에 전정국은 늘 손난로며 담요를 들고 다녔다. 미움 받는 것을 무서워하는 김태형이 매서운 에어컨 바람 앞에서도 한마디 못하고 덜덜 떨고 있을까봐.

 

문득 감기에 걸려 한참을 고생했던 김태형을 떠올린다. 알약을 먹을 때 김태형은 늘 헛구역질을 하곤 했다. 커다란 것을 삼키기 버거운 모양이었다. 알약 하나를 삼키는 것에도 한참이 걸렸고, 입 안에 남은 씁쓸한 감각에 김태형은 울상을 짓고 고개를 젓는 날이 많았다. 나 이거 싫어. 안 먹으면 안돼? 전정국은 고개를 젓는다. 안돼요. 김태형은 쓴 것보단 아픈게 낫다며 전정국을 향해 애교를 피우곤 했었다. 나한테 애교 부린다고 감기 낫는 거 아니거든. 잔뜩 열이 올라서도 김태형은 전정국의 품에 고개를 부비며 애교를 부리곤 했었다.

 

"감기는 옮으면 낫는다던대."

 

약 먹기 싫으면 나랑 키스하던가. 모른 척 내뱉은 말에 입술을 비죽이더니 너한테 옮기는 건 싫다며 꾸역꾸역 먹지도 못하는 약을 삼키던 김태형을 떠올리던 전정국은 느리게 웃음을 흘린다. 싫다며 웅얼거리는 김태형을 어르고 달래 입을 맞췄고, 결국 저도 감기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적이 있었다. 전정국에게 감기를 옮기고 깨끗하게 나은 김태형이 안절부절 못하며 전정국을 졸졸 따라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전정국은 김태형을 위해 아스피린 대신 꼬박꼬박 부루펜을 사와 김태형의 입 안에 밀어넣어주곤 했다. 애기네 애기. 열 아홉짜리 애기. 하며 김태형을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태형은 투정을 부리듯 전정국을 툭 치고,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거리고 웃던 때가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전정국은 정류장에 내리는 김태형을 가만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김태형의 기침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별 후에도 전정국은 지겹게도 김태형을 따라다녔다. 김태형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굳이 김태형을 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태형은 겁쟁이였지만 전정국은 아니었으니까. 형, 형. 하고 김태형을 부르며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이. 대외적으로도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전정국은 껌딱지처럼 김태형을 따라다니고, 김태형은 부끄러워하고. 이젠 부끄러워 하는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피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김태형이 전정국을 사랑한다는 것이 의심 못할 명제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전정국은 간혹 상처를 받곤 했다. 김태형이 잔뜩 표정을 굳히고 전정국을 피할 때나, 전정국이 건넨 사탕들을 가져다 버렸을 때. 혹은, 지금처럼.

 

"나 너 이제 안 좋아해."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만 따라다녀."

 

상처주려 모진 말을 뱉어낼 때.

 

김태형은 전정국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게 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김태형은 모종의 이유로 전정국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전정국은 그런 고의성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다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김태형의 차가운 말투와 표정이었다. 전정국이 김태형에게 말을 걸 때마다 김태형은 주변 눈치를 살폈다. 꼭 누가 볼까 걱정하는 것처럼. 전정국은 그런 김태형이 미웠다. 전정국에겐 김태형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김태형은 자꾸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봤다. 어둠 속이어도, 우리 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쨌든. 조금씩 상처를 받긴 했으나 그 상처에 휘말려 김태형을 포기할 만큼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전정국은 김태형의 냉대가 다 무슨 소용이냐 싶을 만큼 김태형을 꾸준히 지긋지긋하게도 따라다녔고 싱글벙글 웃으며 김태형을 끌어 안기도 했다. 그런 전정국을 보고 김태형은 생각을 좀 바꾼 것 같았다.

 

물론 좋은 쪽은 아니고.

 

김태형은 기본적으로 전정국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전정국이 뱉어내는 말에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부비고 애교를 부리긴 해도 믿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그냥 입바른 소리 정도로 생각하겠지. 자기를 안심시키려는. 전정국은 헛웃음을 흘린다. 김태형은 두려움에 못 이겨 전정국을 버리더니, 이젠 전정국에게 자신의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고 도망가려 했다.

 

도망가는 것 자체는 상관이 없었다. 뭐, 김태형이 뛰어봤자 거기서 거기지. 김태형을 잡아 제 옆으로 끌고 오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김태형은 전정국의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이었다. 김태형은 자기 자신을 해치면서까지 전정국을 피해다녔다.

 

“태형이 형 어디갔어요?”

“김태형? 모르겠는데?”

 

아침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사람이 점심도 먹지 않고 어디로 간건지. 김태형은 전정국과 마주하기 싫다는 이유로 며칠째 점심과 저녁을 굶고 있었다. 어디서 뭐라도 챙겨 먹으면 다행인데. 김태형은 그런 걸 꼬박꼬박 챙겨 다닐 정도로 꾸준하고 성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전정국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가릴 정도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김태형은 도대체 어딜 간걸까. 깊은 곳에 맺힌 숨을 뱉어낸다. 

 

그로부터 삼일이 더 지나고 나서야 발견한 김태형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린 전정국은 김태형의 미련함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김태형은 전보다 훨씬 더 말라있었고, 장마 때문에 쌀쌀해진 밖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닌 탓에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그런 김태형을 발견한 이후로 전정국은 김태형을 따라 다니길 그만두었다. 저 때문에 김태형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태형이 이겼네. 김태형의 그 좆같은 끈기와 전략에 박수 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전정국이 김태형을 따라다니지 않으니 김태형은 서서히 밥을 먹었고, 담요를 두른 채 교실 책상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전정국은 그런 김태형을 바라보며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그럴 리가 없는 걸 아는데. 꼭 김태형은 전정국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오히려 더 괜찮다는 것처럼. 전정국은 창 너머로 달뜬 숨을 뱉어내는 김태형을 바라보다 걸음을 돌린다. 창밖으론 여전히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다.

 

 

*

 

 

알약 한 알이 녹는 동안 김태형은 숨을 참았다. 김태형에겐 삼키지 못하는 저주가 있다. 그 덕에 김태형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고역을 치뤘다. 고작 알약 한 알을 삼키지 못해 죄다 토해내는 날이 잦았다.

 

혀 끝에서 녹아내리는 쓰라린 감각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김태형은 허겁지겁 물을 들이킨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있었다.

 

문득 전정국을 떠올린다. 알약을 잘 먹지 못하는 김태형이 열병에 걸려 고생할 때마다 꼬박꼬박 물약을 사오던 전정국. 울컥이며 올라오는 감정을 느리게 삼킨다. 울지 않는다. 비겁한 김태형에게 울 자격은 없었다.

 

전정국은 자신의 모진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꾸준히 김태형을 챙겼다. 여전히 김태형을 사랑한다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김태형은 그 맑은 눈동자가 두려웠다.

 

“너 전정국이랑 진짜 사귀어?”

 

눈을 꿈뻑이던 김태형은 묘하게 굳은 낯으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내가 걔랑 왜 사귀어.”

“그렇지? 하긴, 네가 게이일 리가 없지.”

 

호모새끼들은 섹스할 때도 뒤로한다며. 으, 존나 더러워. 김태형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과장된 시늉을 하며 낄낄거리는 아이를 따라 어설프게 웃었다. 느리게 웃음을 삼킨 김태형은 주변을 살핀다.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김태형에게 닿았다 떨어진다. 공기가 바뀐다. 김태형은 입안 여린 살을 짓씹으며 웃었다. 묘한 적막이 김태형을 관통하고 있었다.

 

“우리, 그만하자.”

 

그리고 김태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정국에게 이별을 말했다. 전정국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랑했지. 전정국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니까. 그래서 김태형은 전정국을 놓아주기로 했다. 사랑과 축복만을 받아야 할 아이가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의 적의에 가득찬 시선을 마주할 것을 생각할 때마다 김태형은 숨이 막혔다. 절대 그래선 안됐다. 전정국은 사랑만 받아야 할 아이였다.

 

그러나 전정국은 여전히 김태형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맑은 눈동자 속에 김태형을 담고, 김태형의 손을 잡고,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전정국에게 계속해서 모질게 굴 자신이 없었다. 김태형은 전정국이 자신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길 바랐다. 남자인 김태형 대신 다른 좋은 여자 아이를 만나 축복만을 받으며 사랑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 너 이제 안 좋아해."

 

이런식으로.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만 따라다녀."

 

발악에 가까운 말이었다. 분명 차고 올라온 감정으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김태형은 입안 여린 살을 죄다 짓씹었다. 전정국은 눈을 깜빡인다. 전정국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상처 받았겠지. 분명. 분명.

 

전정국이 먼저 자리를 떠난다. 김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자리에 서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채 전정국을 생각한다. 상처 받았을 전정국을 생각한다. 문득 김태형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나서 싸워주겠다던 전정국을 떠올린다. 김태형은 이기적이다. 전정국을 위해 놓아주겠다 말했으면서. 정작 전정국에게 상처를 준 것은 김태형이었다. 김태형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창 밖으로 이어진 빗소리가 김태형의 울음을 묻었다. 김태형은 꺽꺽거리며 베개 속으로 숨을 뱉어낸다. 그래도 이제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말 걸.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가 왔다. 김태형은 난처한 낯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약을 꾸준히 챙겨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열기에 눈앞이 아득했다. 그렇게 자주 휘청였다. 뻗은 손바닥 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뚝뚝 떨어진다. 뜨겁게 달아 오른 몸과는 달리 서늘한 감각이 다리를 스친다. 어떡하지. 감기에 걸린 몸은 차마 빗속으로 뛰어 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 빗속을 걸어가면 더 지독한 열병을 앓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까. 김태형은 한쪽 손에 가방을 든 채로 멍하니 새까만 색의 하늘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가만 바라본다. 비는 언제쯤 그칠까. 서늘한 공기에 스스로 팔을 감싸 부비며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문득 옆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아이가 또 있나. 김태형은 고개를 돌린다.

 

"형."

 

김태형은 눈을 깜빡이다, 입안 여린 살을 짓씹었다. 새까만 우산 하나를 든 전정국이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정국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뭇거리는 전정국을 바라보던 김태형은 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입술을 꽉 문다. 김태형은 들고 있던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린다.

 

김태형은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점점 거세진다. 바닥이며 가방을 툭툭 치고 떨어지는 비는 순식간에 온몸을 적셨다. 달뜬 몸을 겨우 추스르고 김태형은 뛰었다. 온통 젖은 것들뿐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전정국의 목소리가 섞인다.

 

“형!"

 

다급히 저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더 빠르게 옮긴다.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밀어 낼 자신이 없었다. 너를 마주하면 보고 싶었다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나는 너를 밀어내는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네게 여지만 주게 될 것 같아서. 얼굴 위로 폭우가 쏟아진다. 눈이 잔뜩 젖어든다. 몇 걸음 더 떼지 못하고 손이 잡힌다.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나도. 아무도 눈물을 볼 수 없으니까. 고개를 든다. 눈 앞이 어른거린다. 쏟아지는 빗속에 구원처럼 서있는,

 

“김태형."

 

너는.

 

*


“이제 귀찮게 안할테니까.”

 

도망가지 좀 마요. 전정국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잔뜩 어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전정국이 서 있는 모습이 눈 앞에서 일렁인다. 제대로 전정국을 마주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우산 쓰고 가요.”

 

감기 우습게 보지 말라니까. 말 진짜 안 듣지. 전정국은 아무렇지 않은 척 쓰고 있던 우산을 내려놓는다. 장대같이 떨어지는 비가 전정국에게로 스민다. 전정국이 진한 색으로 물든다. 김태형은 멍하니 전정국을 바라본다. 전정국의 말간 뺨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젖어든다. 김태형은 전정국을 바라본다. 전정국은,

 

“아프지 마.”

 

울고 있을까.

 

전정국은 미련 없는 사람처럼 뒤돌아 걷는다. 손을 뻗는다. 전정국을 부르고자 했으나 목에 걸린 말이 뱉어지지 않았다. 김태형은 기침과 함께 막힌 열을 토해낸다. 그럼에도 그 안에 전정국은 없었다. 전정국 그 세 음절을 뱉을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1995_12_
@1995_12_


비가 왔다.

 

온통 젖은 것들뿐이다.

 

 

*

 

온통 젖은 몸에서 뚝뚝 물이 떨어져 내렸다. 신발장을 축축히 적시는 물을 어찌할 생각도 없이 그저 멍하니 서 숨을 고른다. 전정국이 우산을 두고 갔으나 그 우산을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저 우산을 들고 서둘러 집으로 뛰어왔을 뿐이다. 김태형은 제 손에 들린 우산을 내려다보다 울컥이며 식도를 역류하는 감각을 느낀다.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올라오는 것을 죄다 뱉어냈으나 입을 타고 나오는 것은 고통 섞인 신음밖에 없었다. 김태형은 차마 전정국의 이름 석 자를 부를 용기가 없어 다 뭉개진 발음으로 울음을 토해낸다.

 

비에 물든 몸을 씻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눕는다. 전정국 생각을 한다. 제게 우산을 건네며 웃었던 전정국의 눈가에서 떨어지던 물기를 떠올린다. 고개를 돌리면 신발장에 쓰러져 있는 전정국의 우산이 보였다. 문득 전정국을 불러본다. 정국, 아. 전정국. 혀 끝에서 죄다 뭉개진 이름이 흐른다. 내가 감히 너를 불러도 될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김태형을 걱정하면서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전정국을 생각한다. 김태형은 밭은 숨을 고른다. 지독한 열병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눈을 뜬다. 잠시 잠들었던건지. 비에 젖은 몸에 한기가 돌았다. 김태형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앉아 현관을 가만 바라본다. 전정국이 제게 준 우산이 있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김태형은 홀린 것처럼 느리게 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연다. 꼭 그 앞에 전정국이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전정국이 서서 김태형을 꽉 끌어안고 보고 싶었다고 입을 맞춰줄 것 같았다.

 

그러나 전정국은 없었다. 김태형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뿐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김태형은 헛웃음을 삼키며 다시 몸을 돌린다. 그렇게 모진 말을 해놓고, 무엇을 바란건지. 문을 열려 손을 뻗은 김태형은 잠시 눈을 깜빡인다. 문고리에 물기가 묻은 비닐봉투 하나가 걸려 있었다. 덜컥 숨이 막힌다. 김태형은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안을 살핀다. 봉투 안엔 익숙한 아스피린과, 부루펜이 들어 있었다.

 

김태형은 제 안의 무언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울컥이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제게 모진 말을 듣고 몇 번이고 버려지면서도 김태형을 차마 놓지 못하는 전정국을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울 자격이 없는데. 나는 너를 위해 아무렇지 않아야만 하는데.

 

자리에 무너져 한참을 울던 김태형은 봉투를 손에 꽉 쥔 채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긴다. 정국아. 정국아. 계단을 뛰어내리는 걸음이 빨라진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이젠 김태형이 전정국을 잡을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김태형은 신발을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해 맨발로 무작정 빗속을 뛰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빗물로도 덮이지 않는 슬픔이 흘러나왔다. 저 앞에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전정국이 보였다. 온통 젖은 동그란 인영이 보였다. 김태형은 목을 틀어막은 열을 뱉어내려 노력한다. 불러야 한다. 불러야 했다. 나는, 나는.

 

“전정국!”

 

결국 목을 틀어 막고 있던 뜨거운 열기가 울컥 쏟아진다. 주체 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이며 빗물로 엉망이 되었을 얼굴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들어 전정국을 끌어 안는다.

 

"가지마."

 

전정국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김태형은 혹시 전정국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릴까봐 전정국의 젖은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 안는다. 제발. 제발.

 

"가지마 정국아."

 

전정국이 느리게 몸을 돌려 김태형을 바라본다. 김태형은 전정국을 바라본다. 전정국은 엷게 웃고 있었다. 형. 태형이 형.

 

"저는 이제 형 안 좋아할거예요.“

 

단호한 말투가 떨어져 내린다.

 

"형은 나보다 중요한 게 많잖아요."

 

전정국은 자신을 단단하게 안은 김태형의 팔을 잡아 내리고 천천히 걸어간다. 김태형은 그저 멍하니 멀어지는 전정국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비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장마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차마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전정국은 복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김태형 생각을 했다. 김태형이 감기에 걸렸다는 것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열이 오른 머리로 김태형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전정국을 밀어내려 했던 김태형이 이렇게 쉽게 전정국을 잡을 리 없다. 김태형의 진심이 무엇이든. 전정국은 김태형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자 했다. 그 미래에 전정국이 없더라도. 김태형이 원한다면.

 

제 호의에 순간 김태형이 흔들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태형은 단단한 듯 보여도 유약한 사람이니까. 여린 사람이니까. 전정국은 쏟아지는 비를 가만 바라본다. 제 허리를 안았던 얇은 팔을 떠올린다. 그 팔이 꼭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는 것을 불현듯 떠올린다. 김태형은 자신의 몸을 챙길 줄 몰랐다. 감기로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서. 미련한 김태형은 빗속으로 몇 번이고 뛰어들었다. 전정국은 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다, 문득 김태형의 표정을 떠올린다. 전정국이 김태형을 밀어냈을 때 김태형의 얼굴.

 

”설마.“

 

전정국은 홀린 듯 걸음을 옮긴다. 다시금 빗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그곳에 서 있을까봐. 미련한 김태형이 또 제 몸을 혹사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전정국은 빗속을 뛰어 헤매고 있었다.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쏟아지고 있었다. 김태형이 맨발로 뛰어나왔다는 것을 떠올린다. 아직 밖에 있으면 어떡하지. 그 약한 사람이 정말 열병으로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전정국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본다. 쏟아지는 비 탓에 시야가 죄다 하얗게 바랬다. 흐릿한 시야 탓에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전정국은 눈을 깜빡인다.

 

눈을 깜빡인다.

 

전정국은 헛웃음을 흘린다. 씨발. 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심장이 저릿거렸다. 왜. 나를 그렇게 밀어냈으면서. 전정국은 빗속의 인영을 향해 걷는다. 미련한 사람. 미련하고 멍청한 김태형. 전정국의 걸음이 빨라진다. 어느새 전정국은 뛰고 있었다. 날개 꺾인 새마냥 빗속을 홀로 서있는 김태형을 끌어안는다. 김태형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울고 있었다.

 

대체 왜. 왜. 형은 나를.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말이 무작정 쏟아져 나온다. 형. 태형이 형.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김태형은 말 없이 눈물을 떨구며 전정국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물로 엉망이 된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웃었다. 왜 울어. 울지마. 울지마 정국아. 김태형의 웃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애초에 몸이 약한 사람이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

 

"일단, ... 일단 들어가요.“

 

전정국은 김태형의 손을 잡아 김태형의 집으로 걷는다. 혹여 김태형의 감기가 심해질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김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정국을 따라 걷는다. 함께 집에 간 게 얼마만이더라. 머릿속으로 셈해보던 김태형은 이내 그만두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전정국은 능숙하게 김태형을 챙겼다. 잔뜩 젖은 몸을 이제야 덜덜 떠는 김태형을 욕실 안으로 밀어넣고 그 앞에 갈아입을 옷을 꺼내놓더니 자신의 몸에서 대충 물기만 닦아내고 주방으로 가 죽을 끓였다. 김태형은 욕실 앞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전정국을 바라보다, 문을 닫고 물을 틀었다. 뜨거운 액체가 온몸을 적신다. 김태형은 그제서야 막혔던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먹으라고 줬더니 왜 들고 나와요.“

 

약 다 젖었네. 전정국은 뜨거운 물에 녹아 노곤노곤해진 김태형을 침대에 눕히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김태형은 군말 없이 전정국의 손을 따라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인다. 전정국은 비에 젖은 봉투를 뒤적이다 부루펜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전정국은 김이 펄펄 올라오는 죽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문득 김태형은 전정국을 바라본다.

 

”정국아.“

 

전정국은 죽을 뒤적거리며 김태형을 바라본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크고 동그랗게 뜬 눈이 왜요. 하며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김태형은 그런 전정국을 보고 웃었다. 정국아. 정국아. 하고 몇 번이고 전정국을 입 밖으로 부르며 웃었다. 전정국은 고개를 갸웃이더니 김태형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열이 많이 나나?“

 

김태형은 푸스스 웃음을 터트린다. 결국 전정국도 따라 입꼬리를 올린다. 엷게 말려 올라가는 전정국의 입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김태형은 이불에 파묻힌 채 느리게 중얼인다.

 

”좋아서.“

 

곱게 접혀 호선을 그리던 전정국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김태형은 머리 위로 몰린 열에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다며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거짓말 해서 미안해.“

 

김태형은 웃는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을 뱉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거짓말 해서 미안하고, 널 버려서 미안해. 너를 내가 믿지 못해서. 그래서. 전정국은 눈을 깜빡인다. 김태형은 혀끝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를 꿀꺽 삼킨다. 그리고 웃었다. 전정국이 좋아한다 했던 그 웃음을 지으며 한 번만 용서해달라는 것처럼. 다시 나를 좋아해달라는 것처럼.

 

”나는 아직도 많이 무서워. 네가 나 때문에 상처 받을 것 같아서.“

 

전정국이 들고 있던 죽을 내려놓는다. 김태형은 전정국의 맑은 눈동자를 비로소 마주본다. 눈동자 속에 담긴 저 자신을 보면서도 김태형은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태형은.

 

”누가 너한테 못된 말을 하면, 내가 대신 싸워줄게.”

 

아무도 너한테 상처주지 못하게 노력할게. 김태형은 환하게 웃었다. 잔뜩 휘어진 눈꼬리며 벌어진 입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전정국은 김태형을 따라 픽 웃는다. 전정국은 애초에 김태형을 이길 수 없다. 김태형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으니 전정국에게 이렇게 여지를 주는 거겠지. 전정국은 탁자에 죽을 내려놓고 김태형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 그 옆에 눕는다. 김태형은 몸을 틀어 전정국을 바라보며 누웠다. 크고 맑은 눈동자가 전정국을 바라본다.

 

“눈 좀 감아봐요.”

“응?”

“얼른. 감아보라니까.”

 

김태형은 순순히 눈을 감는다. 그렇게 비를 맞았음에도 뜨거운 전정국의 체온이 뺨에 닿는다. 전정국과 닿을 때마다 김태형은 닿는 곳마다 전부 녹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녹아 사라지더라도 네 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감자 온통 어둠 뿐이다. 귓 속으로 전정국의 달콤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대요,”

 

김태형은 서둘러 눈을 뜨려고 했으나, 눈을 뜨기도 전에 입술에 뜨거운 체온이 맞닿는다.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김태형은 전정국의 어깨를 잡아 밀어내려다가도 푸스스 웃으며 입술을 벌린다. 뭐 어때. 전정국이 감기에 걸리면 다시 가져오면 되지. 김태형은 거부 없이 전정국의 목에 팔을 감고 말캉거리는 살덩이를 얽는다. 뜨거운 전정국에게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김태형은 여전히 젖어있는 전정국을 끌어안으며 더 깊이 입을 맞춘다. 제 체온이 전정국을 말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정국은 그런 김태형의 생각을 들은 것처럼 입술을 떼고 웃었다. 잔뜩 열이 오른 몸 탓에 색색거리는 달뜬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온다. 전정국은 김태형의 뺨이며 목덜미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춘다. 바깥에서 몇 번이고 울리는 빗소리가 둘의 소리를 삼켜냈기에 김태형은 입술 밖으로 나오는 신음성을 참지 않았다. 창밖으론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끝없는 장마를 걱정하진 않았다. 지독하던 열병도 시선도 염려하지 않았다. 김태형은 눈을 감는다.

 

둘은 다신 젖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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